1970년, 나는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풍문여자중학교 1학년 단발머리 여중생이 되었다. 1969년 겨울,
중학교 입학배정서를 들고 종로 2가 화신백화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뒤 풍문여자중학교를 찾아갔던 일이 생각난다. 머릿속에 선생님이 그려준 약도를 외워두었던 터여서 학교를 찾아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당시 연희동에 살고 있던 나에게 종로와 안국동은 대처였다.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엄마가 사준 새 운동화가 발을 조이는 탓에 불편한 다리를 절룩이며 화신백화점의 으리으리한 파사드를 지나 조계사를 보면서 안국동 로터리까지 걸어갔다. 지금은 안국동사거리지만 그때는 안국동로터리여서 길이 원형이었다. 그 로터리 뒤로 차례로 풍문여자중 · 고등학교, 덕성여자중 · 고등학교가 있었고 더 올라가면 경기중 · 고등 학교가 있었다. 종로 쪽에서 걸어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위해 그 부근에 육교는 꼭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1970년에 육교가 세워졌다. 그때의 육교는 달리 놀이터가 없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놀이동산 그 자체였다. 육교에 올라가서 그 아래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그것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저 길 너머를 상상했다. 먼 곳 풍경을 바라보다 주변 빌딩들 안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며 놀았다. 또 육교 중간쯤 가서 발을 구르면 육교 전체가 약간 휘청대었는데, 마치 그 사실을 처음 안 것처럼 신기해하며 두 발로 있는 힘껏 육교 바닥을 쾅쾅 두드려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날, 등굣길에 육교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데 어라, 교문이 닫히는 거였다. ‘어? 지각하게 생겼다!’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가던 나는 순간 발걸음을 돌렸다. 뒤따라 달려 내려오던 단짝 친구가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육교 계단을 뛰어오르자 친구도 이내 활짝 웃으며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굉장히 무서웠는데, 특히 지각하는 것을 싫어해 출석부로 지각생들의 어깨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 때렸다. ‘차라리 결석이 낫지!’ 우리는 육교 한가운데로 가서 다시 한 번 쿵쿵 발을 구르고 그 길로 냅다 인사동 쪽으로 뛰었다. 종로 2가쯤 가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등교 시간이 지났는데도 교복을 입은 채 여태 등교하지 않고 길거리를 헤매는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우리는 친구 이모네 아파트 옥상에 몰래 숨어서 놀다가 도시락을 까먹고는 다시 내려와 거리를 쏘다녔다. 땡땡이치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짓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학교에선 지금은 무슨 수업시간일 지를 궁금해하며 그다지 재미있게 놀지도 못했다. 바보같이. 졸업 후에도 어쩌다 인사동에 가게 되면 꼭 그 육교에 올라가보곤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 운동장도 얼핏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 그 육교가 언제부터인가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계단 가운데 모서리가 닳아 움푹 파였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육교 전체가 흔들리며 신음했다.

핫한 발 냄새, 쿨한 아이디어. 

육교 밑은 교차로여서 유난히 차가 많이 지나다녔다. 육교 배 부분을 천으로 감싸야 했던 탓에 통행량이 비교적 뜸한 야간에 한 개의 차로를 막고 사다리차를 쓰기로 했다. 두 사람이 사다리차를 타고 밑에서 천을 받치면 육교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마주 잡아당겨 육교 난간에 천을 고정시키면 되었다. 먼저 종로경찰서에 가서 허가를 받은 다음 육교 앞 10미터 전방에 삼각대를 놓고 2, 3미터 앞에서 형광봉을 흔들며 육교 밑에 사다리차를 대었다. 그런데 밤이 되어 통행량이 뜸해지자 차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형광봉을 흔드는 사람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그날 밤엔 준비한 모든 인력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밤늦도록 고생한 분들과 함께 간단히 요기하기 위해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어서 자기가 들어가면 발냄새가 날까 걱정했던 것이다. 급히 인력을 구하느라 인력시장 티켓을 보고 전화해서 온 분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을 매우 잘 해주었다. 노숙자였던 그분은 아마 내 또래쯤이었던 것 같았다. “아이고, 아저씨, 지금까지 운동화 신고 있는 사람 중에 발냄새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들어갑시다” 하고 등을 떠밀다시피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같이 간 남학생 중 하나가 자기 발을 들어 냄새를 맡게 해주고 나서야 마지못해 끝자리에 불편하게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육교 배면에 천을 설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있었다. 그때 그분이 뒷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그리더니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육교 밑 차도와 인도 사이에 천을 육교와 십자가 되도록 펼쳐놓는다.
− 천의 네 꼭지를 끈으로 묶어 육교 위에서 네 사람이 위로 끌어당긴다.
− 육교 위에서 네 사람이 그것을 잡고 한쪽으로 이동하여 고정시킨다.
− 다음 천도 올려서 마찬가지로 이동하고 첫 번째 천에 이어 붙여 고정시킨다.
그분의 아이디어대로 하면 사다리차도 필요 없고 굳이 밤에 설치할 필요도 없었다. 왜 꼭 사다리차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우리 모두 뭔가에 머리를 한 대 띵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얼얼한 상태에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다음 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걱정되어 나온 종로경찰서 담당자도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하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디어를 낸 어제의 그 노숙자는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 인력시장에도 그쪽 에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만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인력 사무실에 그분이 어떤 일을 했는지 누누이 설명하고 꼭 다시 뵙고 싶다며 간절함을 전했지만 지금까지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분에게 꼭 완성된 작업을 보여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분이 한 번은 지나가다 성공적으로 천에 싸인 육교를 보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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