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방 사포로 사방팔방 뺀질뺀질하게 밀어대는 저 무시무시한 손을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상처와 주름들의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을까? 저 황홀한 주황색 석양과 어울려 나부대는 바람과 날것의 콘크리트 비린내를 기억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여기 이곳을 회복할 수 있을까?

소실점 없는 소멸, 방향도 형태로 사라져버린 대지 속으로의 소멸, 그는 우리의 시선을 잔잔히, 빨아들인다는 느낌 없이 빨아들이는 그 소멸의 힘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멋들어진 아파트들의 ‘숲’ 앞에 펼쳐진, 쓰레기로 남아버린 북가좌동 잔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소멸의 벡터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그 벡터를 따라 주저앉아 오줌을 누고,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며, 거꾸로 서서 잡초 속으로, 그걸 피워낸 대지 속으로 머리를 박고 뛰어 들어간다. 그러나 홍이현숙은 모든 형태와 구별이 사라져버리는 그 소멸의 지대가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출현의 지대임을 역설하려는 것 같다. 그 소멸 속에서 시작되는 생성의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려는 것 같다. 홍이현숙은 남성적인 장엄함이나 숭고함보다는 움직이며 변형되는 신체의 유머를, 가벼움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름 또한 주목하고 싶다. 물론
그것만이라고 할 순 없을 게다. 파괴의 공간 속에서도 대지는 다시 풀을 키워냄을 보고 그 풀 속으로, 대지 속으로 몸을 던져 들어갈 때 느끼는 것은 제목에 붙인 말처럼 비가(elegy)적인 감응이다. 이는 가령 잔해 같은 타일과 더불어 벽에 붙어 있는 샤워기를 ‘길게’ 비출 때, 늦봄의 땀처럼 슬그머니 배어 나온다. 그러나 그 ‘길게’는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비가를 부르는 그의 행위는 결코 비장하거나 비감하지 않고 차라리 난데없어서 ‘비가’라는 말만큼 슬프진 않다. 아니, 알고 보면 약간의 웃음마저 자아내는 블랙유머 같다. 아득한 행보 속에서 사람의 몸이 제로의 크기를 갖는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며 ‘돌아가는’ 곳, 사물들이 미끈한 건물들의 발아래 파괴되어 되돌아가는 곳, 그곳은 대지다. 신체들의 신체, 기관들의 모든 기능적 분화마저 사라진 신체다. 홍이현숙에게 여성의 신체는 그런 대지적 신체, ‘기관 없는 신체’인 것 같다. 모든 것, 추하게 망가지고 파괴된 것들마저 감싸 안고 받아들이는 곳, 모든 ‘폼(form)’들을 지우고 직물적 촉감의 따뜻함으로 포용하는 곳, 그리고 그 소멸 속에서 새로운 생성의 싹들이, 풀들이 피어나는 곳, 그에게 여성의 신체는 그런 어머니− 대지의 신체인 것이다.
이진경(수유너머 n , 과학기술대),  아티클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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