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1년 동안 국립극장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국립극장은 공연예술 인재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지원자를 선발해 여러 부문(배우, 연출, 무대미술, 음악) 의 장르를 통섭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나는 발레리나에서부터 판소리, 배우, 연출 등 다양한 분야의 멋진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특히 당시 국립극장의 무대미술을 담당했던 김동진 선생에게 무대미술 공부를 따로 받았다. 그래서 그 1년 동안 거의 매일 이 국립극장 계단 앞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
  국립극장은 박정희시대 관제 건축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경회루의 필로티와 기둥을 재현한 것이라고 했으며 그 앞에 한국적 건축 계단을 설치했다. 33개의 계단 위를 걸어 올라가야 극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긴 돌계단은 대종상 레드카펫을 깔거나 국가적으로 서사적 강조가 필요할 때 자주 쓰이는 장소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이 돌계단이 많은 일반대중을 소외시키고 극장의 권위와 위엄에 복무하는 장소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 돌계단이 풍기는 딱딱함과 직선의 스펙터클을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말랑말랑하게 만들까를 고민했다.
− 딱딱한 것들, 말랑하게 만들기
− 수직적 권위에 틈내기
− 지루하지 않게 딴짓하며 살기
− 유머 남발하기
− 여럿이 같이하기
− 경계 부수기
− 갤러리 개척하기
− 아무 데서나 전시하기
− 이곳에서 저곳으로 점핑하기
  나는 이것으로 처음 야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무슨 스트리트 미술의 개념을 확실히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때 국립극장 계단에 꼭 작업을 하고 싶었고 갤러리라는 공간이 내 작업을 표현하기에 맞지 않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화이트 큐브가 갖는 여러 가지 제한이 싫었고 거쳐야 할 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이렇게 스스로 다른 공간을 찾아서 전시를 하면 누구누구 큐레이터에게 뽑히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작업이 갤러리를 찾아올 수 있는 특정된 소수의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계단에서 작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막상 어느 부서에 신청을 해야 할지 몰랐다.
  국립극장 안에 이 일을 의논할 만한 부서가 있을까? 궁리 끝에 홍보 담당자를 찾아갔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보여주었더니 관심을 보이며 서류를 놓고 가면 극장장님께 직접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류를 받은 지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름째 되던 날 담당자를 찾아 갔는데, 그제야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극장장님께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지만 내부 분위기상 어렵겠다는 말만 했다. 그래서 하릴없이 서류를 받아들고 나와 무작정 극장장실 복도로 들어갔다. 얼핏 보니 극장장 자리가 다 보이게 비서실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비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극장장실을 향해 큰 소리로 “극장장님 뵈러 왔습니다!” 하면서 곧바로 극장장실로 돌진했다. 극장장님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인사를 받았다. 다행히 마침 쉬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극장장님, 저는 몇 년 전에 국립극장 연수생이었고, 1년 동안 이 극장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꼭 대극장 계단에 하고 싶은 작업이 있어서요. 제가 보름 전에 극장장님께 보여드려달라고 홍보 담당자에게 부탁드렸는데 어렵겠다고 하시네요. 그래서 제가 직접 들고 왔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극장장은 한참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거 그냥 해주시는 건가요? 극장에서는 아무 지원도 안 해드려도 되나요?”
  “네, 물론입니다.” 
“아니, 그럼 저희로서는 안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작가가 작업을 해주신다는데, 극장으로서는 대환영이지요!”
   그 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전시가 만들어진 이후로 국립극장 내외부에서는 활발하게 미술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사실 국립극장 로비와 바깥 공간은 설치미술을 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이 작업을 시작으로 비로소 작가로서 나는 독립했다고 생각했다. 전시 장소 결정부터 철수까지의 과정을 모두 스스로 해냈고 이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생각도 나의 개인적 미술사(?)의 시작으로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극장 앞마당에서 마당극을 할 때, 이 돌계단은 객석이 된다. 옷들은 계단 사이사이로 들어가 그 일을 ‘잘’ 해냈다. 옷은 수많은 사람의 땀과 숨을 간직한 것.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부드럽게 위로해준다. 옷은 아름답다. 옷은 하나하나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이미 누군가의 작품이다. 화려한 옷들과 회색빛 돌계단의 하모니……. 그러나 옷으로 만드는 작품은 영구적이지 못하다. 인간 목숨 70년과 내 작품의 일주일. 일시적이어서 오히려 매력적이다. 맹목적인 자본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작업에 쓰는 옷은 새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쓰다 버린 것. 그것들은 내 작품으로서 태를 바꾸어 쓰이다가 또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작업은 순환의 사이클에 역행하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의 소리에 자연스럽게 속해 있다.  내 작품이 문명의 쓰레기가 되어 지구를 더럽히게 할 순 없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콘크리트는 회색빛 위엄과 어찌해볼 수 없는 완강함으로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그 대표적인 숨막힘의 공간 . 국립극장 대극장 흔들기? 시각적으로 흩뜨려 놓기. 시각은 감성을 얼마만큼 지배할 수 있을까. 그 거대하고 무겁기 짝이 없는 국립극장을 떠받치고 있는 돌계단. 계단은 또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 곳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이 밟은 돌은 그래서 훨씬 녹녹하다.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옷들이 받혀주고 있는 계단을 밟는 태도. 발을 내디딜 때 보이는 미세한 떨림. 그야말로 사뿐히 즈려 밟기. 하나하나의 계단을 즈려 밟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순간 예술가로서 행복했다. 잠깐의 환각을 불러일으킨 마술사로서 행복했다. 계단 중앙에서 꽃밭에 들어온 것 같다고 즐거워하는 할아버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몰래 옷을 잡아 당겨보고는 다시 끼워 넣느라 쩔쩔매는 꼬마, 연극 보러 왔다가 전시까지 보고 간다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작품을 보려고 일부러 작품 앞에서 천천히 차를 모는 택시기사 아저씨들. 우리 머릿속에서 버려진 회색빛 공간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보기. 끌어안아보기. 그 속에 답이 있다.
《월간미술》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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