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회 개인전(대안공간 풀)에 관한 한 개의 서문과 네 개의 비평들
1. 머리가 자라날 때 박찬경(대안공간 풀 디렉터)의 서문
2. 표현되었으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욕망 임정희(미술평론), 아트인컬쳐 2005년 9월호
3. 홍현숙의 풀과 털전은 불투명하다 강수미(미학), 월간미술 2005년 9월호
4. 홍현숙의 풀과 털전 김미령(관훈 갤러리 큐레이터), 미술세계 2005년 9월호
5. 홍현숙 개인전[1][2] 박원식(작가), 미술인회의 자유게시판 등(젤 먼저 써주신 글이지만 편집상 뒤에 올립니다)


머리가 자라날 때
박찬경


자신의 자각 속에 감금된 현대인은 상실된 자발적 감정의 순수성을 그리워한다.
(나르시시즘의 문화, 크리스토퍼 라쉬)
내 작업은 순환의 싸이클에 역행하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의 소리에 자연스럽게 속해있다. 나는 나의 작품이 문명의 쓰레기가 되어 이 지구를 더럽히게 할 수 없다.
(홍현숙, 작가 노트)

최근 열린 북핵 관련 6자회담에서 한국 측 차석대표는 ‘창조적 애매성’이란 외교용어를 사용했다. 애매성이란 외교적 합의사항 문안을 불명확하게 표현하여, 이해 당사국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결론을 열어두는 것이다. 예술비평의 수사법을 외교가에서 빌어다 쓴 것이다.
보통 예술이 창조적 애매성을 갖는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술작품이 명징한 개념으로 남김없이 번역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미술작품이 창조적 애매성 신화에 빠져있다는 데 있다. 외교가에서 창조적 애매성은 그 자체로 고단수의 능란한 외교적 판단의 결과이다. 그런데 오히려 미술에서는, 정말 생각이 애매해서 애매한 작품이 많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애매한 것은 자신을 속이는 구원이 되고, 동시에 예술의 라이센스도 된다. 예술이 하나의 연기가 되는 순간이다.
홍현숙은 모호성에 기대는 대신에 정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정직성이란 말 그대로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말이다. 이는 또 구조의 꼬임이나 모호한 분위기 없이, 명쾌하게 어떤 사실을 직접 제시하는 미학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주춤거리고 수줍어하거나, 숨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것은 최근 우리 미술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심하고 폐쇄적인 양상에 비추어볼 때, 젊은 작가들이 배워야할 상당한 미덕이다.
1999년 원서 갤러리 개인전 당시, 옷과 흙을 층층이 쌓아올리고 맨 위에는 잔디로 덮은 설치작업은 홍현숙 작업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진1) 흔히 작업이 정직하다고하면, 깊이가 없거나 의미가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작업처럼 다양한 의미가 겹치면서 울림이 강한 작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땅의 일부를 떼어놓은 것 같은 이 작업은, 표면과 깊이, 공개와 은닉 사이의 복잡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문명 일반에 대한 간결하고 대담한 통찰로까지 나아간 역작이다.
정직, 솔직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진위표현 문제이기도 하지만, 홍현숙의 작업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내용이다. 대범성, 간결성, 특히 직접성은 단순히 취향이나 작가의 인격 표현이 아니라,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 90년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옷을 집적한 일련의 작품에는 대개 ‘은닉된 에너지’라는 제목이 붙거나, 또는 그런 의미가 부여되었다. 여기서 은닉된 에너지란, 말 그대로 은밀히 숨어있는 힘처럼 다소 신비한 어감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분량의 옷들에는 전혀 숨김이 없다. 이들이 옷의 기능을 상실한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옷의 의미와 느낌이 살아있는 ‘인간적 오브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더 본질적으로는, 사물이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거나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懷疑)보다, 알 수 있고 느낀다는 긍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긍정의 대상은, 마치 옷과 같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으나, 옷 자체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의미처럼 풍부해서, 모두 다 공개되지는 못한 것이다. 아니 공개되어있지만 원리상 전모가 드러날 수는 없으며, 직관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우주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비효율을 감당하지 않고서는 그 모든 역사를 기술할 수는 없는 대상들이다. 과연 어떤 누가 옷의 모든 풍부함 - 옷의 역사, 옷에 깃든 개인의 체취, 섬유산업, 재단사의 하루, 패션과 유행, 가사노동과 세재 발달사에 이르기까지 -을 언어로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옷의 일정한 풍부함이 일상의 기능에서 떨어져 나와 일순간 드러날 수는 있다. 옷이 다중의 몸을 대신하여 도시 건조 환경에 침투할 때, 옷 기둥이나 옷 폭포가 되어 개인을 넘어선 민주주의 축제로 진화할 때 그러하다. (사진2)
이번 대안공간 풀 초대전에서도 기조는 이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일정한 주제의 이동이 있는데, 이는 오랜만에 ‘전시장 개인전’라는 프레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애초의 관심이 되살아난 결과이다. 이번 전시에서 머리에 물을 주고, 머리털이 풀처럼 자라나는 것처럼 묘사한 비디오는, 풀이 자라도록 전시기간 내내 물을 주어야했던 10년 전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또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해왔던 옷이나 천을 사용한 야외 설치, 공공미술의 개인적인 연원을 밝힌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여성,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이다.
이번 전시는 크게 비디오 상영과 설치로 나뉘어져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세 개의 비디오는 설치 작품의 추상성을 보완해주고, 일종의 각주 역할을 한다. 하나는 이소라의 다이어트 에어로빅 비디오를 힘겹게 따라하는 살찐 여성의 모습이다. 같은 여성이 다른 비디오에서는 물구나무서기를 반복하여 시도한다. 우선 이 작업들은 미치광이 같은 ‘몸짱’ 문화에 대한 알기 쉬운 희화이며 비평이다. 이 두 비디오가 단순한 희화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두 비디오 사이에 끼어있는 날개 짓을 반복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미술의 복잡한 수사학과는 무관한, 오염되지 않은 1차적 언어의 소박성과 삶의 건강성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구상하면서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에서 몇 가지 착상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몸이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성(한 가족의 어머니)이 등장한다. 실제로 전시된 욕조나 문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 여성의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사실 이 여성의 물리적인 육체가 너무 커진 나머지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남의 시선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설정은, 이 여인의 몸이 집(또는 가족)과 동일해지는 국면, 즉 몸이 무료한 반복, 절대적인 고립과 정체의 (다소간 극화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몸 자체가 하나의 가구이며 집이다.
흥미로운 것은, 홍현숙처럼 과감하고 개방적인 야외설치를 감행해온 작가가, 이 고립무원의 거구 여성에 대해 갖는 연민이다. 언 듯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안팎의 관계는 전시 디스플레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욕조나 문, 냉장고 등은 영화의 인물이 항상 앉아있는 소파처럼 육체와 동화된 비루하고 슬픈 존재들이라면, 선인장은 그 바깥의 황량한 사막을 상징하거나 지시한다. 이렇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안팎이 단절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이 공간은 그렇게 비참하다든가 남루하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핑크색 문과 벽지, 햐얀 욕조와 높다란 선인장들은 장식적으로 보일정도로 화사하며, 어떤 긍정의 느낌으로 차있다. 선인장은 황량한 사막의 기호만이 아니라, 사막에서 자라는 놀라운 생명체로서의 선인장이기도 하다. 머리카락 - 선인장의 가시 - 날개 - 털 - 풀 등의 이미지가 오버래핑 되면서 전체적인 느낌은, 무게와 정체, 침잠과 실패 보다는 그것을 뚫고 올라오는 거의 생태적 수준의 자라남, 상승, 긍정, 심지어 어떤 자발적인 향락으로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전시의 메인 파트인, 현대 여성으로서는 사회적 단절을 의미할 삭발, 두피의 대지를 뚫고 나오는 발모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비디오 프로젝션에서 요약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 행위 혹은 향락에 대한 모든 시도를 감시하는 자의식은, 외부 현실에 대한 신념의 약화로부터 비롯되고 그것으로 결과한다. ‘이소라 비디오’처럼, 또는 훨씬 더 교묘하고 강력하게 상징화된 정보로 만연된 사회에서, 이 외부 세계의 현실은 그것의 직접성을 상실했다. 여전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이미지, 판타지와 깊이 연루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이 외부세계의 일부가 되었고, 그 실재의 확인조차 급속히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홍현숙은 바로 그 직접성을 회복하려는, 어찌 보면 고전적 조각가의 본업을 수행한다. 자신과 타인의 몸에 대한 끝없는 감식행위의 회로 바깥에 바로 그 몸의 신진대사, 살과 피부와 머리카락의 섭생이 존재한다. 이렇게 확장된 ‘에코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보면 머리카락에 뿌린 물은, 화분에 주는 물을 형태적 유사성을 통해 비유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머리를 자라게 하는 물이다. 풀은 털과 다른 이름을 지닌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빈약한 모호성의 세계가 아니라 풍부한 확실성의 세계이다.


When hair begins to grow
August, 2005
Park, Chan-kyung (Director, Alternative Space POOL)


A modern person confined under self-consciousness misses the purity of lost spontaneous emotions.
(The Culture of Narcissism by Christopher Lasch)
My work does not go against the cycle of circulation. It belongs to the sound of huge nature. I cannot allow my work to become the trash of civilization and to pollute the earth.
(Hong, Hyun-sook, from the artist’s note)
In a recent six party conference on the nuclear weapons of North Korea, a Korean representative employed a diplomatic term "creative ambiguity." Ambiguity leaves some room for the countries directly concerned to interpret the items of understanding according to their own advantage.
There is no doubt that art has creative ambiguity. Artwork cannot be translated entirely as clear concept. Problem is that the majority of artworks are fallen into the myth of creative ambiguity. Creative ambiguity in a diplomatic world is the result of a high degree of diplomatic judgment. In an art world, however, there are many ambiguous works due to the ambiguous idea of an artist. When an artist does not know what to do, ambiguity becomes a salvation for the artist. But it is nothing other than deceiving the artist. At the same time, the ambiguity in that case plays kind of a license of art. In this moment, art changes into acting.
Hong, Hyun-sook relates her story honestly without depending upon ambiguity. The term ‘honesty’ here means that she conveys her idea as it is. It is an aesthetic attitude displaying a fact directly and explicitly, without any structural twist or ambiguous atmosphere. Direct speaking without hesitation or shyness or hiding is a virtue that young artists have to learn, considering the timid and closed climate shown at the contemporary Korean art.
In the exhibition of Won-seo gallery, her installation work?clothes and soil was accumulated layer upon layer, and its top was covered with lawn?shows the above mentioned characteristics well. (Picture #1) When a work is honest, some may think that its meaning is not deep and too simple. But as we see in her work, the honest work canhave various meaning and strong echo. This work looks like a part of ground cut off. It is a labored work that contains a simple and daring insight on general civilization.
Honesty and straightforwardness is itself the content of her works. Free and open manner, brevity, and especially directness are not only a taste or her personality, but also a factor that decides the meaning of her works. Her ‘trade mark’ in 1990th?a series of works that the clothes were accumulated?are entitled by "the hidden energy." The term "hidden energy"seems to have the connotation of mystery. However, actually there is no concealment at all. The clothes are not suggested as ‘found objects’ that lost the functions of clothes, but rather as ‘humane objects’ that have the meanings and feelings of the original clothes.
This is possible because she starts from the affirmation that we are able to know and feel things and the world, not from the skepticism that we are not able to. The objects of affirmation are innumerous around us. But they are not disclosed in her works because the meaning of objects is so abundant like the clothes have abundant meanings. Who can express all of the abundant information on the clothes?its history, personal odor permeated into clothes, textile industry, fashion, and so on!
However, the abundance of clothes can be isolated and shown temporarily when the clothes permeate the urban environment, become clothes-pillar or clothes-fall, and evolves into a democratic festival. (Picture #2)
In this invitational exhibition at the Alternative Space ‘POOl’, the basic tone is same. The only change is the move in the theme, and it is the result that the frame such as ‘exhibition hall’is given. So her original interest was revived. In this exhibition, the video that describes pouring water upon the head and growing hair like grass, reminds us of her work of 10 years ago. At that time, she had been sprinkling water for the grass to grow for the exhibition period. This is not just returning to the past. It has the meaning to identify the origin of her outdoor installation or public arts using cloth or clothes. Her interest is nothing other than woman and woman’s body.
The exhibition is divided into video show and installation. Three videos installed at the gate of the exhibition hall compliment the abstractness of the installation work, and play a role of footnote. One is the picture of a fat woman moving laboriously after Lee So-ra’s diet-aerobic video. The same woman repeats a headstand in another video. These two works are the explicit caricature and criticism on the crazy ‘mom-zzang’culture or body- shape oriented culture. Because of the image repeating the flapping of the wings, these two videos do not end just as a caricature. Here we see the nivete of the first language and the healthy life.
The artist relates that she got some ideas from the movie ‘Gilbert Grape.’ In the movie, a woman appears who became too fat to go out of her house. The bathtub and the door that were installed in the gallery remind us of the woman. She cannot go out of her house because her body is too big, and because of other’s gaze. Such establishment makes the woman’s body to be identified with the house. Namely, the body becomes the place of dull repetition and absolute isolation. The body itself is a furniture and a house.
Interesting thing is the compassion that Hong, Hyun-sook has for the huge and isolated lonely helpless woman. As the artist has carried out the outdoor installations which are passionate and open. The relationship between outdoor and indoor art shows that seems to be contradictory is reflected in the display. While bathtub, door, refrigerator, and etc. are the lowly and wretched being like the sofa which is assimilated with the body, cactuses symbolize the bleak desert of the outside. Likewise, in general, the inside and the outside are form the severed space. However, if you enter into the inside of the hall, the space does not give the impression that is miserable or shabby. On the contrary, pink colored door, wallpaper, white bathtub, and tall cactuses are brilliant to the extent that is seen as decorative, and full of affirmative feelings. The cactuses are not just the sign of bleak desert, but the one of wonderful life which is growing in the desert. The images of hair, cactus’ prickle, wings, grass, and etc. are overlapping, and as a result, the general feeling goes forward to growth, elevation, and even a spontaneous enjoyment, rather than weight, stagnation, sinking, failure. Those are the summarized messages in the video projection where tonsure symbolizing social severance as a woman and the image of hair growing through scalp-ground appears.
Self-consciousness that keeps watch on all trials regarding spontaneous action or enjoyment arises from the weakening of the conviction toward outside reality. Like ‘Lee, So-ra’s video’, and in the society filled with much more shrewd, and strongly symbolized information, the reality of the outside world lost its directness.
In the society where woman is more deeply related to images or fantasy rather than man, the body of woman became a part of the outside world, and became impossible to identify its reality. In a way, Hong, Hyun-sook carries out the principle occupation of a classical sculptor to regain the very directness.
Outside the circuit of the watching act toward the body of self and others, there is a body’s metabolism or the regimen of flesh, skin, and hair. To the eye of an enlarged eco-feminist, the water sprinkled upon hair is not just a metaphoric one through similarity in form. It is the actual water that makes hair grow. The grass is identical with hair, but just having a different name. It is not a world of poor ambiguity, but a world of abundant certainty.



홍현숙개인전 <풀과 털>리뷰
표현되었으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욕망
임정희


홍현숙의 여덟 번째 개인전, “풀과 털”이 대안공간 ‘풀’의 초대로 이루어져 8월 8일부터 23일까지 두 주일간 전시장 전시를 통해 관람자들을 만났다. ‘은닉된 에너지’라는 제목의 시리즈 작업들(1999년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 인사동 육교 설치프로젝트(2000), 통일전망대 설치프로젝트(2002) 등의 개인전과 ‘COEX국제도서전(2004)’, ‘신도시전(2003,2004)’ ‘소풍 프로젝트(2002)’ 등의 그룹전에서 보여준 작업들이 대부분 야외에, 대규모로 설치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시장 안으로 들어 온 이번 작업들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연속과 변화 또는 소통과 단절, 확산과 집중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서게 한다.
이전 홍현숙의 야외 설치작업에서는 관람자들이 생태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일관되고 질서잡힌 재현의 세계 속으로 끌려들어가기 때문에, 시점의 일면성이나 부분의 파편성은 치환과 대체의 비전을 통해 은폐되거나 연기, 또는 해소되어왔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자리잡은 지층의 표면에서 자라나는 보리싹들, 청바지들로 펼쳐져 출렁이는 바다물결, 육중하고 근엄한 통일전망대 건물과 육교를 싸안은 호랑이피부 등은 작업의 의미를 단일한 시점에서 총체화하는데 매우 유익하고 효과적인 심상(心象)을 제공하였다. 작가와 관람자들을 이어주고, 제한되고 통제된 통로를 마련하는 이 심상의 특성은 작가 자신의 고립되고 특수한 사적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이해와 논리적 서술의 합당한 조건이 되어 문화적 생산 내에서의 의사소통을 방해하거나 단절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작품을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동시에,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이러한 미적 소통가능성, 통합적 지각의 일반 가능성은 그러나 작가가 이미지 자체의 내용과 형식을 통제할 수 있는 ‘기왕의 어떤’ 힘에 기대고 있음도 드러내주었다.
반면 이번 “풀과 털” 전시에서 작가는 야외작업에서와 달리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힘에 기대지 않고 존재론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의미화의 과정을 수행한다. 작가가 기대었던 힘의 익명성이나 중립성, 비존재감이 사라짐으로써, 문화적 생산 내에서 작가와 관람자를 이어주는 시공간의 연속성과 총체적 이해의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은 가운데 여성으로서의 작가의 위치가 삐걱대며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핑크색 벽지를 두른 공간에 놓인 하얀 욕조와 굵은 가시를 지닌 선인장들, 잘린 냉장고와 삐죽이 솟은 선인장, 잘려나간 머리카락과 두피를 뚫고 남아있는 머리카락 등의 물질적 대상들은 그에 일 대 일로 대응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도 않고, 실제 세계의 어떤 것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물질적 대상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가는 더 이상 통일되고 일관된 이미지가 아닌, 실제 삶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성별화된 존재로 경험된다. ‘여기’에 집중된 홍현숙의 여성주의적 시선이 ‘저기’에까지 이르지 않고, 관람자와의 연결성이나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못한 채 고립과 단절과 불연속성의 느낌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고립과 단절의 느낌은 작가의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시간경험이 미술언어를 통해 불러낸 효과이다.
새롭고 대안적 관점을 지닌 문화적 생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온 작가는 이제 그 문화적 생산이 사회적 삶에서의 자신의 부재를 전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성별화된 시각문화적 이미지를 생산하였던 작가 홍현숙이 전시장 전시를 통해 이미지가 성별화된 방식으로 구축되는 조건들, 즉 시각문화적 이미지 자체의 사회적 통제과정을 되짚어 묻고 있는 것은 의외이다. 마치 ‘여성의 날’, 씩씩하고 과감하게 거리행진을 마치고 돌아온 중년여성이 난장판이 되어있는 집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널려있는 아이들의 옷가지와 식기들을 치우며 씻으며, 흘러서 굳어버린 국물자리를 문질러 지우면서 내뱉는 독백, ‘한심하다, 한심해’를 엿듣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40대 후반의 작가에게서 감각의 기억(완성과 이해)에 의존하지 않고, 반복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롭게 느끼는 감각을 표현하고자하는 욕망-표현방법의 충분함과 불충분함에 대한 의문제기보다 더 앞선 표현욕구-의 진정성을 만난다는 것은 흔치않은 경험이다. 이번 홍현숙의 전시를 의미의 세계와 관련지워 의미목록에 첨가사항을 기대했던 관람자라면, 애매함과 모호함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걸으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서 들여다보는’ 능동적 움직임이 필요할 듯 하다. 기대를 접으면, ‘보여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과정에 난 구멍, 간극을 찾을 수도 있으니. 물론 구멍이나 간극의 바닥은 볼 수 없을테지만. - 임 정 희 ( 연세대 겸임교수/ 미학·미술평론가 )



홍현숙의 〈풀과 털전〉은 불투명하다
강수미


홍현숙의 〈풀과 털전〉은 불투명하다. 이는 출품작들의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전시의 의미가 모호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설정된 무대처럼 영상과 사물이 배치된 전시 전체는 일견 ‘쿨’하게 보이지만, 기실 전시의 중심인 영상들은 상당히 복잡다단한 감정과 의미의 결을 직조한다는 뜻에서 이 전시는 불투명하다. 그리고 이 결이 작품의 몇몇 뻔한 요소 때문에 감상자에게 ‘고스란히’ 감촉되거나 전달될 수 없다는 사정에서 불투명하다. 연극적 설치와 작품의 뻔한 요소들은 이 전시를 손쉽게 특정 미술 코드에 꿰어 맞춰 읽게 할 것이다. 살찐 여자가 다이어트 비디오 따라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과 불뚝 솟은 선인장 화분들, 과감하게 사선으로 절단된 냉장고, 박찬욱 영화의 세트를 연상시키는 생경한 벽지, 여성의 몸 부피를 누비질한 문짝. 이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볼 경우 그 상징의미는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강박, 공격적 남성성, 거세, 복수의 심리, 여성의 수공예성 등으로 딱딱 떨어진다. 그런데 페미니즘 운동에 열심인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그런 배경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나온 표현인지 모를 이 드러난 몇몇 소재를 덥석 물 경우, 비평은 초라해지고 〈풀과 털전〉은 다르게 이해받지 못하고 묻힐 것이다. 해석의 한 가지이겠지만, 이 전시의 강점은 예의 비판적 페미니즘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고 상호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두 영상이 포착했다는 데 있다. 〈물구나무서기〉 영상의 사소한 유머와 행복감, 〈물주기〉 영상의 난센스한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그것이다. 대낮 집 안의 창가에서 반복해서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하는 중년 여성이 와중에 하는 하품, 난데없이 나타난 고양이를 멍하게 좇는 시선은 그녀를 뷰파인더에 갇힌 피사체가 아니라 우리를 웃게 만드는 생생한 현실의 아줌마로 살린다. 또 그녀가 헤벌쭉 웃으며 팔을 벌리면 겨드랑이에서 금속 털 무더기 혹은 날개가 솟아나는 다른 영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웃음에 전염된 행복감에 젖게 한다. 바로 옆 다이어트 체조로 비대한 육신을 들어올리는 영상과는 달리, 전시의 메인타이틀인 〈물주기〉는 수풀 같던 여성의 머리털이 잘려 나간 후 삭발한 두피 위로 물이 분무되는 영상인데, 풀과 머리털을 이미지로 유비시킨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의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느낀다. 영상 속 삭발한 여성이 분무되는 물을 맞고 마치 풀처럼 성장하리라는 작가의 비논리적 기대감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의 메커니즘과는 달리 인간의 감정과 사물의 의미는 직선적이거나 명쾌하지 않다. 미술의 기능 중에는 이 다발적이고 불투명한 감정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현상해서 감상자로 하여금 공감하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홍현숙의 전시는 작품의 일부 상투적 표현을 제외하면 우리 육신의 삶에 대한 구체적 현상물로 난센스한 공감을 자아낸다.-강수미·미학



홍현숙 - 풀과 털
김미령(관훈갤러리 큐레이터)


그의 작품 <체조>에서 비만한 여성은 다이어트 비디오를 틀고서 운동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삭발을 하고 스프레이로 물을 뿜는 장면이 보여 진다. 또 한 켠에서는 중년의 뚱뚱한 여성이 두 팔을 벌리고 환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는 날개가 돋아나고 있다. 전시장 한 구석엔 욕조와 사람 키만한 선인장이 서있다. 그리고 한 모퉁이엔 분홍빛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려지길 기대하고 있다.
홍현숙의 이번 전시 <풀과 털>은 몸에 관하여, 즉 인간의 육체에 관하여, 다시 말하여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라는 거대한 몸짓에 대하여 확대 해석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 작업은 순환의 싸이클에 역행하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의 소리에 자연스럽게 속해있다. 나는 나의 작품이 문명의 쓰레기가 되어 이 지구를 더럽히게 할 수 없다.”
여리 여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풀, 좀 더 청초하고 좀 더 순수하게 느껴지는 풀은 실은 곧 강하고 굳세어질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털이라고 명명된 것은 육감적이고 좀 더 강하게 그러나 좀 더 폭력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풀과 털의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즉 사적인 감정을 개입해 보면 혹은 그것들을 마주치게 되는 상황에 따라 그 입장이 완전히 뒤 바뀔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 둘 다 자라나는 힘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즉 생명을 가진 물체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근대주의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즉 몸과 정신, 나와 타자, 남성과 여성, 세계와 나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에게 많은 제한과 압박을 주었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명명화된 코드를 대상에 부여함으로써 그 코드에 부합되지 않으면 이단 아닌 이단으로 몰리게 되어 인간에게 외적, 내적 압박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극복의 대상으로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압박을 가한다.
홍현숙의 <풀과 털>의 전시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단면과 그 갈등을 시사해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홍현숙 개인전 관람기 [1]
풀과 털 ( 2005. 8. 8 - 8. 23 , 대안공간 풀)
박원식


오픈날이라 많은 손님들이 북적대는 속에서도 나는 전시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한참 동안 전시 공간을 어슬렁거렸다. 전시장을 못 본 사람들을 위해, 전시 광경을 문장으로 재구성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계단을 내려가 전시장 출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세 개의 LCD 모니터를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모니터에서는 뱃살이 출렁거리는 여인이 엎드려서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리는 동작을 보여준다. 과체중을 줄이기 위한 운동이다.
두 번째 모니터에서는 뚱뚱한 중년 아줌마를 연상시키는 여인이 양팔을 수평으로 폈다가 다시 차려자세로 돌아가는 동작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양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여인은 행복에 겨운 웃음을 짓고 겨드랑이 사이에는 황금색의 고불고불한 물체들이 마치 날개마냥 펼쳐진다. 그것이 무언가 싶어 작가에서 직접 물었더니, ‘빵끈’이라고 대답을 해 준다. 작가가 대답한 ‘빵끈’이란, 빵 봉지를 묶는 비닐 입힌 철사끈으로 이는 일상 생활에서 묶었다 푸는 데 흔히 쓰이는 도구이며 마트에서는 이것을 ‘칼라끈’ 혹은 ‘컬러타이’라 부른다.
빵끈이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속으로 ‘털, 번뇌, 욕망, 자본의 축적, 배꼽 밑의 저축으로서의 비계살’ 같은 어휘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가(佛家)에서 머리털은 번뇌와 욕망의 상징이다. 지혜의 빛이 비치지 않는 깜깜한 무명(無明)의 세계를 상징하는 ‘무명초(無明草)’다. 공교롭게도 동양인의 머리털은 검은 색이다.
작가는 털을 인간 욕망의 상징으로 차용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비구니처럼 머리를 싹 깎은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복까지 걸치는 연출은 하지 않았지만 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자못 내공을 느끼게 했고, 뒤풀이 자리에 온 손님들은 그녀의 카리스마에 대해 쑥덕거렸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한 남자 손님은 말했다. ‘전시회에 안 오면 짤릴 것 같아서 왔다.’고.
(아, 나는 언제쯤이면 내 개인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력을 가지게 될까?)
손톱 자라듯, 머리털이 자라듯, 뱃살이 늘어나듯, 욕망의 확대 재생산 체제는 일상에서 소비를 촉진시킨다.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집계될 때 경제 성장이요, 가정의 가계부에서는 쌓이는 저축이요, 개인의 몸으로 스며들면 그것은 군살이다.
세 번째 모니터에서는 예의 그 여인이 역시 다이어트를 위해 물구나무 서기를 시도하다가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두 번째 모니터에서 겨드랑털을 과장시켜서 상상력의 재미를 가미시킨다. 자라지 않는 겨드랑털을 자라게 하여(그것도 빵끈으로) 날개 깃털마냥 만들어 놓았다. 과연 그 노오란 빵끈 날개를 달고서 우람한 중년 여인은 행복의 천국으로 비상할 수 있을까? 그 날개로 날기를 시도하는 것은 똥뱃살을 비치볼마냥 빵빵하게 부풀려서 사해(死海)를 떠서 건너려는 시도처럼 무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세 개의 모니터를 지나 우측 너른 공간으로 진입하면 물이 담긴 뽀얀 고급 욕조가 놓여 있고, 그 욕조 둘레에는 30여 개의 선인장 화분이 빙 둘러져 있다. 선인장은 일미터가 훨씬 넘는 것들이 많아 운반하는데 꽤나 애먹었음직해 보였다.
손님들이 들오고 나가는 그 혼잡한 와중에도 나는 전시 리뷰를 꼭 쓰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작가에서 물었다.
“이 선인장은 사막을 환기시키는 것 같은데, 그렇죠?”
“그렇지요.”하며 작가는 천장을 가리켰다. ‘사막의 햇빛을 표현하기 위해 형광등을 달았다’고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전시장에 형광등 조명이라.’
(어라, 이 작가, 앞머리가 양쪽으로 조금 튀어나왔다 싶더니만, 짱구를 제법 돌리네!)
사실, 내가 작가에게 묻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장의 형광등을 찾아내는 데 꽤나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선인장으로 사막을 환기시켜 놓고 그 가운데 욕조를 놓은 의도가 확연하게 손에 잡혔다. 풀 한 포기 없는 팍팍한 사막 한 가운데, 샴푸 거품으로 긴 머리털을 감는 여인이 썼을 듯한 욕조의 배치는 대비의 장치임이 분명했다. 또한 가시 달린 선인장은 내게 머리를 민 승려나 학생의 머리를 연상시켰다.
현대시를 개척한 T.S. 엘리엇은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시 <황무지>에서 정신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상황을 물 한 방울 없는 돌산에다가 비유했다. 그래서 시인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잠꼬대처럼 시 속에서 중얼거려 본다.
drip drop drip drop drop drop
그러나 시인의 시구는 주술력 잃은 무당의 주문과 같아서 물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작가 홍현숙은 물질적 풍요가 결코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고갈과 삭막함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지, 실크로드의 사막을 오가는 사람들의 인내와 절제를 일상의 과욕(過慾)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하려는지, 풍요와 안락의 상징물인 고급 욕조 주위에 선인장을 둘러 놓았다.
욕조와 조금 떨어져 전시장 모서리에 둥근 도어록이 달린 문짝이 서 있는데, 그 문짝에는 솜을 넣어 재봉질한 핑크빛 천이 덧대어져 있다. 솜의 요철로 인해 문짝 전체가 하나의 부조와 같은 느낌을 주며, 재봉질한 선은 중년 여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여인의 뒷모습 윤곽선 바깥에 또 재봉선 둘을 둘러놓았는데, 이는 작업 과정에서 솜 넣은 천을 좀더 촘촘히 누비는 효과도 있으려니와 전체적으로 여인의 팽배하는 군살을 연상시킨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돌쩌귀를 사용하여 이 문짝을 벽면에다가 고정시켜 놓았다. 또 문짝 밑에는 작은 바퀴를 달아서 관람객이 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나 같으면 벽 모서리에 적당히 세워 놓고 말았을 텐데, 이 작가 작업이 만만치 않다.
조금 물러나서 보니 기역 자의 두 벽면에다 도배를 해 놓은 게 내 눈에 들어왔다. 꽃무늬에 분홍색으로 에로틱한 방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배지였다.
요약컨대, 작가는 중년 여인의 안락한 방 분위기를 연출해 놓고서는 그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선인장들을 가져와 사막의 이미지를 거기에다 중첩시켜 놓은 것이다.
문짝을 돌아서 다음 벽면을 보면 장승 크기만한 선인장 한 그루가 우뚝 서 있고, 그 앞에 뒷면을 비스듬히 잘라낸 냉장고가 누워 있다.
‘무엇으로 냉장고를 이렇게 잘라 내었을까?’
나도 냉장고 문짝에다 그림을 그리고, 저번 개인전에선 냉동실 속에다가 책을 넣어 냉장고를 서가로 바꾸는 작업을 해 보았지만, 이런 형태로 냉장고를 잘라 내는 것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냉장고의 한쪽 모서리가 꼭지점을 이루는 비스듬한 사각뿔 형태의 이 냉장고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비스듬히 위를 향해 누운 문짝을 열어 보니 빈 캔, 우유곽 등 식료품 용기들이 들어 있다. 일상의 욕망과 소비를 대변하는 것으로 냉장고가 동원된 것은 알겠는데, 왜 이런 형태로 놓여 있는 것일까? 냉장고의 기묘한 형태를 감상하면서 나는 한참 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렸다. 마침내 나는 지리 시간에 배웠던 ‘사구(砂丘)’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 마음의 무르팍을 쳤다.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자료 이미지로 제공되는 ‘모래 언덕(dune)’- 그 뒤에 서 있는 선인장이 이것을 넉넉히 보증해 주고 있었다. 설치를 보여 주긴 하지만 냉장고를 비스듬히 잘라 모래 언덕으로 만들어 내는 솜씨는 그녀가 조소과 출신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몇 년 전부터 폐 냉장고를 소재로 하는 기획전을 생각해 오고 있다. 내게 그 기획권이 돌아오면 이 작가를 스카웃해야지.
냉장고가 놓인 벽면을 돌아 마지막으로 출입구의 왼쪽 벽면에는 빔 프로젝터의 대형 화면이 돌아간다. 작가가 ‘물주기’라 명명한 2분 44초 (?) 짜리 영상물이다. 비에 젖은 풀밭인 듯한 이미지가 비치는데, 그것은 물뿌린 두발을 클로즈업한 것임을 이내 알 수 있다. 이어서 어지럽게 잘려진 머리털의 영상이 비치고, 다시 짧은 머리 위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물주기’라는 제목에서 나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래된 우스개 하나를 떠올렸다.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학생의 아버지가 학교를 다녀간 이후로 담임 교사의 관심과 사랑을 받던 아이가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담임의 관심도 차츰 사그라들자, 이 학생이 자기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아빠, 우리 담임 선생님에게 물 한 번 더 주라.”
아, 나는 나의 화단에 물을 제대로 주고 있는가? 나의 안방을 잘 가꾸고 있는가?
홍수와 같이 넘쳐나던 나의 샘도 이제는 말라버렸다. 말라터진 샘 주위로 나는 풀을 심는다.
삶의 또다른 한 고비를 접어들면서 나는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고단하고 팍팍한 길 위에서 나의 눈물만이, 내 땀만이 그 길을 녹이는 물일까?
작가의 전시 덕분에 나는 또 선인장에 대한 상념을 가동시켜 볼 수 있었다. 선인장(仙人掌)의 한자를 풀이하면 선인(仙人) 곧, 신선의 손바닥[掌]이다. 신선의 손바닥이 왜 가시투성이일까? 넓적한 모양의 선인장이 손바닥을 연상시키는 것은 짐작이 되는데, 왜 하필이면 가시 손바닥일까? 표면의 가시에만 생각이 멈추었을 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가시 투성이 선인장의 속은 물이다. 사막에서 물은 생명 그 자체다. 갈증에 지친 사막의 나그네에게 선인장은 구원의 물이다. 어찌 표면의 가시에 걸려 넘어지랴. 생명을 주는 부처님 손바닥인 것을.
아아, 그대 눈물로 나를 온전히 씻어 주기만 한다면, 내 어찌 그대의 가시에 찔리는 것을 두려워하랴?
아아, 삶의 가시여. 예술의 상처여. 선인장이여. 그대의 손길이여!-박원식 (2005. 8. 11)



그 여자의 방
- 홍현숙 개인전 관람기 [2]
(2005. 8. 16)
박원식


나는 위의 관람기를 작성한 다음 이 글을 곧바로 홍현숙 작가의 이메일로 보내어 작가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그 여자의 방’ 이라는 선행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했다. 전시장의 벽면을 도배한 도배지가 ‘에로틱’하게 느껴지더냐고 내게 물으면서, 자신의 의도는 여자의 방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했다. 욕조도 고급 소비 문화를 비판하기 위함이라기보다 문짝과 함께 여자의 방을 위한 소도구들이라 했다.
원래 전시장의 파티션 벽면은 천장보다 낮은데, 천장과 벽면 사이의 공간을 판자로 덧대고 그 위에 벽지를 붙여서 3. 6m의 천장의 높이를 전시 공간으로 다 활용하여 높이감을 연출하고 싶었으며, 그 높이감에 대해서 바닥면에 길이감을 대비코자 냉장고를 잘라 옆으로 눕혔다고 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모래언덕’으로 읽은 나의 ‘적극적 오독’에 대해서 작가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발견이며 그것을 수용하고 응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독서는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창작에 가까운 나의 작품 읽기의 근원은 기묘하게 잘려진 냉장고의 형태에 있지 않나 싶다. 추상적인 자연의 형태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온갖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듯이 말이다. 관람기를 매개로 작가와 좀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나는 한편의 글을 하나 더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의 방
중년 여성의 안방은 무엇인가? 그것은 각기 딴 방을 쓰는 자녀들을 잉태하고 길러내었던 방이다. 각자의 방에 대한 요구처럼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자녀들도 포대기에 싸인 시절은 그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지냈다. 밖으로 열심히 나돌아다니는 남편도 자녀를 수태하기 위해선 안방에서 여자의 곁을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자녀 생산(生産- 원래 이 단어는 자녀를 낳는 것을 뜻했다.)이 중단된 중년 여인의 방은 무엇인가? 산업화에 의해 가동이 중단된 대장간의 식은 용광로처럼 그것은 썰렁하다.
출산과 육아의 생산성에다 여성의 정체성을 둔 전근대적 여성들에게 산업화된 현대의 핵가족 제도는 한편으로 과도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산성의 고갈, 여성성의 황폐화를 불러왔다.
모던한 차림새를 하고서 대형할인마트에서 카드로 쇼핑을 하는 요즘의 중년 여성들도 그 학창 시절의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란에는 대부분 ‘현모 양처’라 기재했던 세대임을 감안하면 외양과 생활의 패턴은 후기 산업사회에 편입되었다 할지라도 성장기의 의식 구조를 이루었던 내용들을 스스로 극복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체성의 위기와 갈등에 처하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되는 사실이다.
서리가 내리기 직전까지 긴 줄기 끝에다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호박의 생명력처럼 여성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팔 남매, 구 남매를 낳아 기르던 우리 어머니들의 생산력은 한 두 자녀로 생산을 마감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이적(異蹟)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면 핵 가족 제도에서 여성은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어떻게 승화시킬까? 우선 자녀 생산 대신에 경제 활동을 통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함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삼는 통로가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 사회 활동, 봉사 활동, 종교 활동 등을 통해 한 개인 여성으로부터 벗어 나와 사회적 자아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길이 있을 것이며, 세 번째로 취미나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승화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막의 방
자신의 내면으로나 사회 활동으로나 어디로든 나갈 통로를 찾지 못한 여자의 안방은 바야흐로 사막화가 진행된다. 그 여자에게 외부 세계란 멀리 내다 보이는 아파트 베란다 창에 비치는 풍경이요, 모니터 유리에 비치는 그림일 뿐이다. TV에서 보여 주는 즐겁고 아름다운 세계도 자신과는 먼 이방의 세상이다. TV 속에서 날씬한 몸매의 여인들이 하는 체조를 애써 따라해 보지만 그것은 닫힌 방안에서 혼자만이 연출하는 우스꽝스런 헛짓에 불과하다.
작가가 세 개의 LCD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뚱뚱한 여자의 몸짓은 바로 그것이었다. 닫힌 여성의 방안에서 여자 혼자서 벌이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부산의 작가 방정아도 황폐화된 여성의 극단적인 양상을 회화로서 재미있게 표현한 바 있다.
작가 홍현숙은 어떤 윤리적 관점에서 현 사회를 조망하고 그 문제점을 비판, 분석하기보다는 우선 자신이 처한 심정의 현실, 한 여성의 심리적 고갈을 표출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출발시키고자 했다.
T. S. 엘리엇은 자신의 절망과 지옥을 노래했다. 그런데 그것은 1차 대전 후의 유럽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 20세기 영시의 새로운 금자탑으로 남았다.
홍현숙은 자신의 정체성의 위기로부터 작업의 기초를 삼아 한 작가로 출발하였다. 이제 이 작가가 얼마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느냐는 자신의 고민을 얼마나 성실하게 심화시키고 확대시켜나가느냐 하는 과정에 그 열쇠가 놓여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머리털 - 여성성의 상징
긴 머리털이 여성의 상징임은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다. 구도(求道)의 의지에서 비롯된 경우를 제외하면 여자의 삭발은 재난이나 징벌의 결과이다. 우매한 아버지들은 바람난 사춘기의 딸들을 징치(懲治)하느라 머리를 발갛게 깎아 버리곤 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마리아는 (배역 : 잉글리드 버그만) 스페인 내란 속에서 여성을 유린당한다. 그녀의 깎은 머리는 그녀의 수난을 대변한다.
여성의 자기 정체성 상실을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삭발 : 나는 작가 홍현숙의 삭발을 이렇게 다시 읽어 본다.
그러면 ‘물주기’라는 영상물이 이해의 연결 고리 속에 들어 온다. 황량한 사막에도 물을 주어 가꾸면 푸른 풀밭이 생기듯이, 삭발한 머리도 잘 기르면 다시 아름다운 머리채를 회복할 수 있다. 썩은 다리를 잘라내는 것은 불구로의 선택이 아니라 몸 전체를 구하고자 하는 자기애(自己愛)의 결단이듯이 깎은 머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을 향한 새로운 시도인 것이다.
작가 홍현숙은 그 소망을 마침내 이루어 낼 것인가? 조용히 작가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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